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세계 대전/배경 (문단 편집) === 발칸 전쟁 === 한편 한동안 잠잠했던 발칸 반도에서 다시 위기가 터지게 되는데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틈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를 [[1908년]] 러시아 제국의 사전양해를 얻어 완전 합병한 것이었다.[* 보스니아는 관할권 기간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일한 "[[아시아]]"라며 천대받았다. 일종의 외곽 영토였던 셈.] 그러자(세계1차대전쟁) 발칸 반도에서 남(유고)슬라브족 통합운동을 주도하던 세르비아 왕국은 이 안건이 확정되자 격렬하게 반발했다. 또 같은해에 불가리아 역시 오스만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히 독립을 선언했으며, 여기에 더해 [[아드리아 해]]로의 진출을 위해 알바니아 지역을 노리던 세르비아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헝제국이 알바니아 왕국의 독립을 지원하자([[1911년]] 이후 - [[알바니아 독립전쟁]]) 세르비아의 남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뚜껑이 열려버리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제국의 지원으로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서로 접촉하였고, 여기에 세르비아 2중대였던 [[몬테네그로 왕국]]과 [[그리스 왕국]]이 가담한 [[발칸 동맹]]이 성립했다. 그러나 발칸 동맹 국가들은 러시아 제국의 희망사항과는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보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발칸 반도에서 몰아내는 데 더 몰두하게 된다. 발칸 동맹의 주도국가인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모두 팽창정책을 추구했지만, 오헝제국으로부터 땅을 뜯어내기에는 아직 오스트리아가 강력했으니 그나마 유럽의 환자로 전락한 오스만 제국이 만만하게 보였던 것. 이것이 제1차 [[발칸 전쟁]]([[1912년]] 가을 ~[[1913년]] 봄)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썩어도 준치라고 약소국들의 모임인 발칸 동맹보다 체급이 훨씬 더 큰 오스만이 승리를 거둘 거라는 열강들의 예상을 깨고 발칸 동맹이 압승을 거둬 에노스-미디아 선 서쪽의 모든 영토를 획득했다. 일은 여기서 더 커진다. 1차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떡실신시킨 발칸 동맹 국가들이었지만, 이제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뜯어낸 영토를 어떻게 나눠 가질지 싸우게 되었다.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알바니아와 북마케도니아 지역을 점령한 세르비아였으나 세르비아의 아드리아 해 진출을 두고볼 수 없었던 오헝제국과 이탈리아의 개입으로 알바니아가 독립하면서 그나마 먹은 북마케도니아의 절반을 원래 주기로 되어 있었던 불가리아한테 주는 것을 거부하고, 불가리아 왕국은 불가리아 왕국대로 자신의 몫(산 스테파노 조약 당시의 마케도니아)을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과하게 요구하면서 나머지 발칸 동맹 국가들과 갈등을 빚게 된 것이다. 결국 불가리아가 용감하게 세르비아에게 선빵을 치면서 다시 1913년 여름에 전쟁이 터지는데 이를 제2차 발칸 전쟁이라 한다. 그러나 발칸 동맹 소속이었던 [[그리스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이 세르비아 편을 들며 참전했고, 여기에 [[루마니아 왕국]]도 불가리아와 [[영토 분쟁]]을 벌이던 남도브루자를 노리고 참전하였으며,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일부나마 회복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까지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1:5 다굴을 맞으면 제아무리 '발칸의 프로이센'이라도 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 전쟁에서 획득한 영토 상당수[* 특히 [[이스탄불]] 코앞의 동트라키아(오늘날의 "유럽 터키" 지역).]를 토해내게 된다. 물론 불가리아는 잡았으나, 발칸 반도의 친 러시아 통합 세력을 탄생 시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배후를 위협하려 했던 러시아 제국의 대전략은 그야말로 엿 먹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것들이 힘 합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견제하랬더니 자기들끼리 피 터지게 싸운 뒤 서로 원수 지간이 됐으니... 이 분위기 속에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더욱 세르비아로의 통합을 열망하였고, 자국의 안정을 위하여 작게는 통합 정책, 크게는 제국 내 소수민족 전체가 동등한 주권을 가지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을 그리고 있었던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독립을 실패하도록 유화 정책을 내세운 적의 수괴나 다름 없었다. 결국 발칸 전쟁이 끝난지 한해가 채 못 되어 보스니아 시찰에 나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물론 사라예보의 암살 자체가 기막힌 우연이었고, 그 이후 전 유럽 적 전면전으로 나아가는 과정 역시 우연이 많이 작용했지만, 결국 "유럽의 화약고" 발칸에서 비롯된 세계 대전은 이미 2년 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셈이다. 하지만 세계 대전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라예보 사건]]으로 문제가 촉발된 것과 그렇지 않은것은 분명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알아야 한다. [[사라예보 사건]]의 피해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발언권이 매우 높았던 오스트리아 황위 후계자였는데 그는 지나친 친독 정책 및 러불에 대한 적대정책을 반대하고 발칸 반도 문제를 전쟁보다는 협상으로 평화롭게 해결하려고 하였다. 만일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 사건으로 사망하지 않고 다른 문제로 열강들의 갈등이 폭발한 것이였다면 발언권이 높았던 프란츠 페르디난트에 의해 오스트리아는 중립을 지킬수도 있었고, 그렇게 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현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오래 존속했다면 역시 똑같이 동유럽으로부터 촉발된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역사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현대로 보더라도 2022년에 일어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도 사실 역사적 배경까지 깊게 파면 중부-동유럽과 발칸 반도를 장악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빼놓고 얘기할수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